주식실패사연

주식실패사연- 내가 살아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

알고리즘포식자 2022. 10. 3.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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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이따금 나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딸의 일기를 훔쳐보고 난다는 사실 훔쳐본다면 죄스러움이 앞서야겠지만 원래 마음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내 아이는 아빠가 평소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지내나 하는 부모로서의 방향을 잡아보려고 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소 아빠가 미처 생각지도 못하는 부모에 대한 감정을 표시하는 경우가 있어 인륜적인 면에서 아빠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읽게 다 그러나 집 안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런 내용은 일기에다 쓰고 있지 않은 걸 알게 되었다. 


아마도 선생님이 매일 일기장을 확인하여 도장을 찍어 주기 때문이리라 그러던 중 일기장 한 부분에 이런 글이 발견되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된 딸과 4학년 된 아들이 있는데 지아비를 닮아서 그런다는 눈매는 세상을 깊이 살펴볼 수 있는 그윽함이 서려져 있다. 


난 이런 모습이 마냥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철없는 눈망울이 그저 좋을 뿐 그렇게 만든 것도 지압 탓이려니 하니 가슴이 메워져 온다. 


다른 친구들과 어우러져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지만 동아리처럼 아마도 학일 발표할 때 노래와 무용을 발표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주 모여 연습도 하고 그중에서 노래 연습도 하고 서로가 연습하면서 비용이 조금씩 들어가는 모양인데 5천 원씩 돌아가면서 쓰다가 네 딸내미 차례가 지나고 다음 친구 차례인 모양인데 다음 친구가 준비가 안 되었던지 부득이 내 딸내미가 비용을 지출하게 된 모양이다. 


다른 건 아니고 배경 음악으로 들어가면 가수의 노래 테이프를 사는 것인데 칼레 미는 거금 5천 원을 또다시 들어가게 되었다며 억울하다는 내용의 하소연 글이다. 


그 어구 하다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나를 슬프게 한다는 요즘 아빠가 주식을 사서 돈을 많이 까먹은 모양인데 우리 집에 돈도 없는데 자기가 또 비용을 지출하게 되어서 억울하다는 내용이다.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오면서 내가 자식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언제 보여주었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메어왔다 하긴 주식 끊으라고 하는 마누라하고 여러 번 싸우고 마누라의 화병 차원을 넘어 공황장애에 이르기까지 견뎌준 아이들의 마음이 어른들의 마음을 뛰어넘고도 남는다.


그러다가 문득 내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라진다. 


난 어릴 적 아마도 4살 때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부모님들이 서울로 서울로 향할 때 콧물 질질 흘리며 부모님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정착했는데 그때는 새끼 줄로 줄을 그으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할 때이다.
이제야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무허가 건물이었고 소유권은 물론 국가 것이다. 


그때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신림동 계곡물이 무척 맑았다는 것과 밤이면 안 한 애들이 계곡물에서 목욕도 하는 것들 그러는 생활 중에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다시 미알이 기름 동으로 이사하고 한 말은 미달이 고개를 리어카에 짐을 싣고
그 뒤를 졸졸 쫓아가며 이사하던 기억이 난다. 


난 지금 직장 관계로 지방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가끔 설악을 고등학교 맞은편 비탈진 고개를 지나다 보면 그때의 감정을 잊을 수 없다. 


지금 지리적으로 기준을 잡으려면 아직도 비탈진 곳에 소방서가 있고 그 위쪽 도로변 판잣집에서 살았으니까 그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부모님이 밭에서 무 배추를 사다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팔아서 집으로 돌아올 때 누런 봉지의 쌀을 한 아름 사서 돌아오면서 보여준 부모님의 그 승리의 찬 모습을 이 나이가 되도록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후 배추를 팔기 위하여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내가 보여준 엄마 꼭 깎아 사워야 돼서 하는 모습도 같이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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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세월을 흘러나오는 초등학교를 가고 학교에서 장난이란 장난은 제일 많이 피워 초등학교 1학년 때 학부모를 초청하여 교실 자랑을 하는 전날 실수로 전시문을 모두 망가뜨려 부수어 버렸고 지금 이 세상을 살도록 그렇게 선생님으로부터 얻어맞은 적이 없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울음은 기본이고 지금 이렇게 살아오면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를 주워 팰 수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이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어린 마음에 너무나 가난하여 그토록 얻어맞지 않았나 생각이 그때의 기준으로 될 정도였으니까 절대 지금의 기준으로 그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때도 치마가 바람이 대단하였고 아마도 그때가 초등학교 치마가 바람의 시초가 아니었을까


그건 지금의 내 아이의 눈망울만큼이나 내가 선생님을 이해하고 지내버렸고 지금도 그때의 시대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냥 넘어간다. 


그런 것은 마음 한구석에 좋지 않은 추억으로 남아 있어 어린 마음에 잊어버렸지만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들었던 건 점심시간에 쓰레기 소각장을 맴돌던 나의 모습이다.


사실 지금도 쓰레기를 태우고 남은 대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는 나를 평온하게 한다는 점심시간 백 리의 한 나는 총알같이 교실에서 나온 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학교 울타리 맨 뒤에 있는 쓰레기 소각장 쪽으로 가야만 했다. 


어린 마음에 점심을 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면 어린 마음에 나의 자존심, 쓰레기 소각장을 서성거리며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엔 언제부터인지 쓰레기 태우는 냄새가 친구가 버렸다. 


그때부터 쓰레기 태우는 냄새는 나의 마음에 고향이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는 마치 젖이 모자란 아기가 어머니 젖무덤을 그리워하듯이 배가 고프면 그냥 쓰레기 소각장을 찾아 나섰다. 


그 매캐한 냄새는 나의 허기를 채워주고 그 힘에 힘을 북돋아 오후 시간을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서 선생님이 육성회비 월 600원을 내지 못하는 사람을 호명하여 불러일으킨다는 당연히 내가 빠질 리 없지 아마도 5개월 치가 밀린 모양이었다.


내가 첫 직장에서 월급을 받을 때 보았던 누런 봉투의 월급봉투 그런 색깔의 봉투가 나에게 청구서로 가끔 직물이었차 월급을 받을 때의 누런 봉투는 나에게 행복이 아니라 야릇한 공포심마저 느낄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나는 선생님의 육성 회비를 내지 않는 학생들 불러일으켜 세운 마음을 100번 이해한다는 나도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그것이 교장과 교감 또는 교육정책 담당 부서의 의견이었지 선생님이 취하고 싶은 모습은 절대 아니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그리고 나는 용기를 내어 집에서 어머님께 말했다. 


그것도 방과 후에 말하지 못하고 통학하는 날 아침 어머님께 말씀드렸던 일이다. 


그동안 어린 마음에 부모님 걱정을 끼쳐 들지 않기 위하여 수없이 여러 사람 앞에서 일으켜 세워지며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불러 교무실까지 갔어도 말을 못 했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더는 견디어 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때 아마도 육성 회비 납부 실적이 저조한 학급은 위에서 많이 혼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날 어머님이 아침 일찍부터 물 찌개를 쥐고 공공상수에게서도 물을 길어 오시던 때 말씀드렸으니 지금 생각해도 타이밍을 무척이나 잘못 잡았다. 


공공상수도 돈을 내야 하는데 그 돈도 빠듯한 상황에서 물 찌개를 지구와 힘까지 든 상황에서 육성회비를 주지 않으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철없게 우기고 있었으니 얼마나 어머님은 화가 나셨을까 결론은 뻔하다 논리적으로 설득하여 이해시키기엔 상대방이 너무 나이가 어리다든가 아니면 설득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기 걸 리다든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참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인 사람은 온몸으로 말한다는 것을 어머님이 물지에 양쪽에 걸려 있는 물혹을 내려놓고 쇠 갈피가 달린 물 찌개로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모른다는 그리고 난 엉엉 울면서 학교에 갔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은 돈이 없어 육성 회비를 못 주는 마음보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던 나의 말에 더 분노하였던 것 같다.
그렇게 내 초등학교 시절은 갔고 나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초등학교 딸내미 이야기를 하다 보니 부모님 이야기를 포함해서 그 중간 내용은 건너뛰고 난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최고 좋은 대학 나름대로 최고 좋은 학부에 들렀다. 


그러나 알다시피 사업을 한다면 행하든 망하든 하지만 나는 운명이 어떻든지 간에 월급쟁이로 돌아섰다.
남들이 알면 괜찮은 위치의 월급쟁이다. 


그러나 그 월급은 적다. 부모님이 나름대로 최고 학교에 들어갔을 때 마을이 들썩였다. 


경제적인 면에서만 그렇고 인생이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닌 단지 부모님이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에 맞추다 보니 그런 것이고 알량한 자존심을 끝까지 내세운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은 그야말로 외형상 간판 면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모습이었고 부모님의 팔자가 판 것처럼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부모님이 바라는 내세울 만한 세상이 아닐뿐더러 나의 특유한 강직함과 정의감이 기존의 부모님 기준에 항상 못 쳤었다. 


그러면서도 단칸방 한구석에서 아버님은 항상 정직하게 올바르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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